가리방(등사기)에서 PC로 오기까지
  • 우용원 기자
  • 승인 2019.07.02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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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시 홍보전산과 공보담당 고홍석
 

요즘 구내식당에 가거나 강당에서 교육을 받을 때 주위를 둘러보면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이 많다.

돌이켜보면, 내가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던 8~90년대에는 청사에 모르는 직원들이 거의 없었다. 새로이 들어오는 직원의 수는 적었고, 인사이동도 그리 많지 않았던지라 청내에 근무하는 직원 하나, 하나에 대해 어느 부서에 근무하고 성격은 어떤지, 주량은 어느 정도 되는지, 취미와 특기는 무엇이고 가족관계는 어떻게 되는지, 과장되게 말하면 몸 안의 털구멍 수까지 다 알고 있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가리방’이라고 얘기하면 아는 사람이 이제 얼마나 될까? 등사기라는 말보다는 일본어였던 가리방이라는 말이 익숙했던 시대, 가리방 긁어서 출장복명서, 리별용지를 만들었고 주판 튕겨가며 행여 삐뚤어질까 기안지에 자를 이용해서 공문을 작성했던 시대가 있었다.

마을 출장 가서는 이장 집에서 밥 얻어먹고, 자동차는 언감생심 꿈도 못 꾸고는 오토바이, 자전거로 출퇴근하면 그저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봉급날이면 두툼한 노란 봉투를 금세 외상술값으로 탕진하고, 남은 돈은 하숙비로 지불하고 나면 몇 푼 손에 남지도 않았다. 그렇게 남은 돈은 대폿집에서 동료들과 한잔하면서 다 쓰고서는 ‘다음번에는 네가 살 차례’라며 농을 던졌던, 박봉이었지만 사람 냄새나던 정겨웠던 시절이 있었다.

정부에서는 ‘식량증산’을 녹음기처럼 반복하던 시대, 다수확 통일벼가 아닌 일반미 아끼바리 못자리는 전 직원을 동원해서 갈아 엎어버렸고, 중앙에서 영농현장에 출장 나온다는 소식이 들리면, 지프차 이동 경로를 얼른 파악해서 차가 지나가는 길 옆 논에 난 피를 뽑았던 시절이 있었다.

보고서도 조금이라도 보기 좋게 만들려고 전문 필경사를 동원해 아쉬운 소리해가며 한자(漢字) 섞어가며 만들어내고, 챠드사가 써준 챠드판을 이용해 막대지휘봉으로 현장에서 보고 하던 그런 시절을 지금의 젊은 세대 공무원들은 먼 다른나라 얘기처럼 들을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그 시절 같이 부대꼈던 선배 공무원들은 하나, 둘 떠나가고, 가리방을 기억하는 우리네들도 떠날 날이 멀지 않았다

현대 문명 덕에 지금은 누구나 PC를 다루며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지 않아도 예쁜 글씨로 만든 멋진 보고서를 만들어내고, SNS나 유튜브 등을 통해 좀 더 편리한 것들을 찾아내는 빠르게 적용하는 시대가 됐다.

옛날 얘기가 조금 길었지만, ‘나 때는 말이야’라며 요새 젊은 공무원들에게 훈계하려고 쓰는 글은 아니다.

그저 ‘그런 시절이 존재했었나’ 싶은, 이제는 아련한 기억 속에만 남아 있는 그 시절 선배 공무원들의 생활을 조금이나마 기억해줬으면 하는 조금은 서글픈 바람만 있을 뿐이다.

뿌리 없는 나무가 어디 있겠는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내 자식, 우리 가족은 나보다는 조금이라도 편하고 좋은 세상에서 살고 싶다는 소망 하나로 버텨왔던 사람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이런 좋은 사무 환경이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가리방을 열심히 긁었던 선배 공무원 중에는 공직을 떠나 다른 직장이나 단체에 적을 둔 분도 계신다.

하지만 여전히 그 시절 몸에 밴 습관에 따라 시간 엄수는 물론, 후배들보다 먼저 회의를 준비하며, 상대방을 먼저 배려하는 모습을 보여주시는 분들이 많다.

이 글의 제목에 등장하는 가리방을 이해하는 공무원들 대다수는 독수리 타법으로 컴퓨터 자판을 누르고 서투르게 엑셀 프로그램을 다루는 분들일 것이다. 하지만, 그 분들의 존재를 허투루 보거나 무시해서는 안 된다.

과거 그런 노력과 전철이 없었다면 오늘의 우리가 이런 환경을 느끼며 살 수 있었을까?

공무원은 정년이 정해져 있다. 직장에서 물러나도록 법에 정해져 있는 나이를 의미하는 정년은 슬프지만 아름다운 퇴장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제 곧 또 다른 선배님들이 정년을 채우고 물러나신다. 그 분들의 손에 잡힌 굳은살은 공직을 시작하면서 잡았던 볼펜이 그 분들에게 선사했던 훈장이리라.

기회가 된다면, 얼굴을 모르더라도 굳은살 박인 손을 잡아드리고 그 동안 정말 수고 많으셨다는 말씀을 해 드리자.

선배들이 걸었던 길은 곧 후배들도 걸어야 할 길이다.

이제는 나도 아는 직원들이 점점 줄어드는 걸 보니, 선배들의 길을 가야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나보다.

청사 복도에서 이제는 얼굴도 기억하기 힘든 낯선 직원들과 인사를 주고받다가 흐린 기억 속에 남아있던 아름다운 추억이 떠올라 글을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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